한권의 책이 남기는 충격 (한남충)

[독서 일기]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 끊임없이 흘러야 행복하다

Ufungi 2023. 1. 2. 15:02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최대 쾌락 = 최대 행복?

18세기 이후 산업주의 체계는 현대 사회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 체계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구성원인 인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 가지 사상을 주입한다: "많이 가질수록 행복하다". 즉 무제한적인 모든 욕망의 충족이 최대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사상이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이기심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과연 최대 쾌락과 이기심이 인간의 행복으로 이어질까?

극단적 쾌락주의는 ... 단 하나의 예외적 인물을 제외하고는 - 중국 및 인도, 근동, 유럽의 인생철학 대가들이 전개해온 "행복한 삶"의 이론에서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p. 16


과학적으로도 최대 쾌락은 절대 최대 행복이 될 수 없다. 자극적인 쾌락에 의한 즉각적인 보상은 단기간에 많은 양의 도파민을 분비하게 하여 행복을 일으킨다. 하지만 너무 많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면 인체는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부터는 같은 크기의 자극에 대해 도파민 방출량 또는 도파민 수용체를 줄인다. 그 결과 사람은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지만, 결코 행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소유 vs. 존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프롬은 이 책에서 인간의 두 가지 실존 양식인 소유와 존재에 대해 정신분석학, 심리학, 문학, 언어, 신학,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소유와 존재 양식이 일상적인 것들, 즉 학습, 기억, 대화, 독서, 지식, 권위, 신앙, 사랑 등 모든 측면에서 대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유와 존재 양식은 인간에 모두 내재되어있는 특성들로, 둘 중 어떤 양식을 더 개발하느냐에 따라 성격 구조가 달라지고 행복하거나 불행해질 수 있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유적 실존 양식을 버리고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살아야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두 실존 양식의 차이는 본문에서 인용된 다음 괴테의 시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나 홀로 숲속을 거닐었지
아무것도 찾을 뜻은 없었네.

그런데 그늘 속에 피어 있는 작은 꽃 한송이 보았지
별처럼 반짝이고 눈망울처럼 예쁜 꽃을.
그 꽃을 꺾고 싶었는데 꽃이 애처롭게 말했네.

"내가 꺾여서 시들어버려야 겠어요?"
하여, 꽃을 고스란히 뿌리째로 캐어
예쁜 집 뜨락으로 옮겨왔지.

조용한 자리에
다시 심어놓으니
이제 늘상 가지 치고
꽃피어 시들 줄 모르네.

괴테, <발견>


괴테는 꽃의 아름다운 생명을 소유하려던 욕망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성을 찾고 꽃은 꺾어지는 순간 죽은 것이 되며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꽃의 생명을 유지한채 옆에 두어 사랑하기로 한다.

소유와 존재의 차이는 언어 관습의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 행위가 소유개념으로 표현되는 예가, 즉 동사 대신 명사가 사용되는 예가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그러나 "소유하다(have, haben)" 라는 말을 명사와 묶어서 어떤 행위를 표현하는 것은 어법상 옳다고 할 수 없다. 과정과 행위는 소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p. 40


현대 언어 관습에서 보이는 동사의 명사화는 체험과 활동(동사)을 인간으로부터 분리시켜 고정 불변의 사물(명사)로 만들고, 인간이 스스로 체험하기를 중단하게 만든다. 돈, 옷, 자동차 등은 소유할 수 있는 사물이지만(사실 이것도 영원하지 않으므로, 사실 인간이 소유한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현대인은 소유의 대상을 확장시켜 "생각을 가지다", "관심을 가지다", "문제를 가지다" 등 인간의 활동까지 사물로 만들어 소유하려고 한다.

이는 더 확장되어 인간은 자아를 소유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현대인이 자아를 소유하려는 경향의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예는 MBTI 에 과몰입하는 경향이라 생각한다. 최근 몇 년 간 MBTI가 유행중인데 이 검사의 결론은 "넌 16가지 성격 유형 중 하나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넌 원래 그런 사람이니 그대로도 괜찮아" 이다. 그런데 MBTI에 과몰입하게되면 고정 불변의 자신의 성격 유형에 사로 잡혀 성장하기를 멈출 수 있다. 이처럼 소유 지향적 태도는 인간이 자신이 소유한 것들에 의해 정의되게 만들고 성장을 방해한다.

이 외에도 인간은 인간으로서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에 저항하여 성장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변화하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 자체가 바로 진화, 즉 변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인간은 종 특유의 특징과 본성을 공유하고 있지만 종 자체도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일반적으로 새가 성장하려면 어릴 때는 입을 벌리고 소리를 크게 내며 부모로부터 먹이를 받아먹고, 때가 되면 나는 연습을 하고, 구애의 춤을 열심히 춰야할 것이다. 이 중 하나라도 방해를 받는다면 새는 불행할 것이다. 이처럼 새는 새의 본성대로 성장해야 행복하며,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현대 과학의 주요 발견 중 하나인 '인간도 결국 동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인간의 이성적 측면을 소외시켰고, 인간도 그저 생물학적 생존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사상이 만연해진 것 같다 (진화심리학 자체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어느 정도 이런 측면에 기여하는 것 같다). 그리고 생물학적 생존 본능은 쾌락 추구, 위험 회피를 의미하며 최대 쾌락 = 최대 행복이라는 소유적 실존 양식과 일치한다. 이러한 사상은 산업 사회가 인간을 통제하기 편하도록 만들어준다. 하지만 인간은 생물학적 생존 본능 뿐만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 인간 이전의 모든 종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창발적 특징인 이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성은 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롬은 지능과 이성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이성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의 도구이고, 지능은 세상을 보다 성공적으로 조작하기 위한 인간의 도구이다. 전자는 본질적으로 인간이고 후자는 인간의 동물적 부분에 속한다. ... 이성이란 감각으로 파악된 표면을 꿰뚫고 표면 뒤에 있는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에리히 프롬,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


스피노자는 말이 말의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듯이 이성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고유한 특성이며, 이 특성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동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성을 계발하지 않으면 생물학적 생존 본능으로 회귀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성을 계발하려고 노력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

존재적 실존양식의 전제조건은 독립과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 가장 본질적 특성은 능동성이다. 여기서 능동성이라고 함은 겉으로 보기에 바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내면적 활동상태를 뜻한다. ... 다시 말하면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며,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p. 129 - 130


존재적 실존 양식은 독립, 자유, 이성을 전제로 하며, 그 본질은 능동성이다. 그리고 능동성이란 인간의 본성인 이성에 따라 자신을 규정하는 것들을 버리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버리는 것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저 유아적 반항에 불과하며, "~로부터의 자유"는 될 수 있지만 "~를 향한 자유" 가 될 순 없다. 진정한 자유는 성장을 향한 자유이며, 소유를 버리는 것은 성장의 충분조건이다.


대학원생으로서 체험한 소유와 존재

대학원에 입학하고 2~3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어느 순간 내가 좋아하던 장르의 영화를 봐도 예전만큼 재미가 없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발표에도 집중을 못했는데, 당시에는 영화나 발표 자체가 흥미롭지 못한 내용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하지만 그건 자기 합리화였고, 문제는 영화나 발표 내용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무기력해져 외부 세계에 관심을 두기 힘들게 된 나의 성격 변화였다. 나는 과학적 문제에 집착함으로써 나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 즉 사물로 만든 것이었다. 또한 나는 도구가 된 내 모습에 안주했기 때문에 더 이상 비판적 이성을 통해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않았고 긴 세월 인간으로서 성장하지 못했다. 최근 동료 대학원생들하고 교류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나 뿐만 아니라 많은 대학원생들이 어느 순간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변화에 찰스 다윈의 자서전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성은 인간(Homo sapiens)만이 보유한 천부의 재능이며, 구체적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로서의 조작적 지능은 동물에게나 인간에게나 공통적으로 주어져있다. 이성의 통제가 없는 조작적 지능이 탁월하면 할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위험하다.
순전히 과학적으로 소외된 지능이 한 인간의 인품에 초래할 수 있는 비극적 결과를 제시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찰스 다윈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기는 30세까지 음악, 문학, 조각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즐겼지만, 그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이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취미를 잃어버렸노라고 쓰고 있다. "나의 정신은 엄청난 양의 사실들에서 일반적인 법칙을 찍어내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다. ... 이런 취미들의 상실은 곧 행복의 상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상실은 우리 본성의 정서적 측면을 약화시킴으로써, 지성을 헤치고 나아가서 도덕적 성격까지 해칠 수 있을 것이다." (E. F. Schumacher, 1973, 독역판, 170쪽에서 재인용)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p. 214


자연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대학원생의 경우 대부분 스스로 원해서 이 길을 택했기 때문에 자기의 연구에 삶을 바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삶의 전부가 되버리면 서서히 인간성을 잃고 조작적 지능만 발달하여 그저 논문을 찍어내는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 이 글을 읽게 될 대학원생 후배들은 이성과 지능을 구분하고, 두 가지를 동시에 발달시킬 수 있도록 워라밸을 실천해서 나와 같은 길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책에서도 워라밸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어쨌든 강박적으로 일에만 몰두하는 것도 철저한 무위도식도 모두 사람을 미치게 만들 것이다. 일과 휴식이 적절히 배합되어야만 우리의 삶은 견딜 수 있어진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p. 20


하지만 결국 내가 체험을 통해 깨달은 것들은 아무리 언어로 표현하려 해도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뭐든지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는 수밖에 없다! 나도 예전엔 이성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을 놓았을 때의 결과는 알지 못했다. 나는 그 결과를 직접 체험했고, 사람은 능동적으로 끊임 없이 흘러야한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서는 체험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모두 스스로 맛보는 것은 좋은 일이야. 속세의 쾌락과 부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어렸을 적에 배웠다. 오래전에 알았지만 지금에서야 비로소 그것을 제대로 체험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을 단지 기억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마음으로, 위로 알고 있다.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참 다행이다!'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p. 133


두서 없이 썼지만 그래도 이 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