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젖비단그물버섯
- R
- 심리학
- 외생균근균
- 갓생
- Cannon PowerShot G7 X Mark III
- 영화 후기
- 계묘년
- RStudio
- 청도요
- 철학
- mushroom #mushrooms #mushroomhunting #mushroomphotos #mushroomphotography #mycology #mycologist #fungi #fungalecology #fungaldiversity #fantasticfungi #버섯 #탐균 #버섯탐사
- 탐조
- 생물정보학
- 대학원생
- 영화 해석
- 더 웨일
- Rstuido
- 바운새
- 둠칫새
- 에리히 프롬
- 곤줄박이
- 토양미생물학
- 코딩
- 영화
- 영화 일기
- 생명과학 균학 미생물학 Biology Mycology Microbiology
- 토양학
- 영화 리뷰
- 파이썬
- Today
- Total
워라밸 중독자
[독서 일기] 장자(莊子) - 도를 아십니까? 본문

장자를 왜 읽는가
내가 갑자기 흑인이나 백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마이클 잭슨처럼 춤을 추는 것도 아마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힘들긴 하겠지만 애초에 별로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가 되고 싶은 최선의 내가 되고자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깨닫고 그 안에서 '최선의 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아닐까?
에리히 프롬의 책들을 감명깊게 읽고 다른 철학 책들을 찾고 있을 무렵 '莊子(장자)'를 발견했다. 첫 장을 펼치자 내가 좋아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도 <장자>를 "내가 아는 모은 중국 사상 서적 중에서 가장 명료하고 매력 있는 책"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도 장자를 읽어보기로 했다.
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장자의 저자 장주(편의상 둘 다 장자라고 부르겠다)는 기원전 365년~290년에 살았던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이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잠재우기 위해 '제자백가'로 불리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타났으며, 장자도 그 중 한 명이다. 장자는 <도덕경>을 집필한 노자의 도가 사상을 계승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노자는 도를 터득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반면 장자는 도를 통해 개인의 삶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장자가 사회를 마냥 등진 것은 아니며, 다만 개인의 완성 없는 정치 참여는 부질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는 무엇일까? 장자는 도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이라고 말한다. 도에 대해 말하고자 책까지 썼으면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심지어 도가 사상가인 노자의 <도덕경> 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노자, <도덕경>
그럼에도 장자는 문자를 통해 도를 알리고자 한다. 다만 이는 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에 대해 말할 수 없음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애초에 도는 인간의 얄팍한 지식이나 분석을 통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는 인간의 논리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으며 '말' 은 체험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에서는 직접적으로 "도는 무엇이다" 라고 말하기보다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 간의 대화, 또는 비유적인 이야기를 통해 상징적으로 도를 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달이라 생각하지 않듯이, 장자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를 도라 생각하지 말고 숨은 뜻을 깨닫고 도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크게 깨어나라 (大覺)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장자는 잘 몰라도 '호접지몽(胡蝶之夢)'은 들어봤을 것이다.
32.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물화(物化, 사물의 변화)'라고 한다.'
<장자> 제2편 제물론
장자는 꿈에서는 자신이 장자인 줄 모르고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그러다 꿈에서 깨자 꿈이 꿈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꿈에서 깨어난 여기가 진짜 현실일까? 이것도 사실 꿈이지만 깨어나지 못해서 깨닫지 못하는 것 아닐까? 이처럼 깸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나는 것을 '대각(大覺)' 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실도 그냥 꿈일 수 있으니까 막 살아도 될까? 장자는 인생이 꿈처럼 덧없다는 허무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 깨어있는 줄 아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깨어있다는 생각은 나는 옳고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은 틀리다는 자만과 같다. 예전에는 진리라고 여겼던 것들이 지금은 얼마나 많이 뒤집어졌는가? 우리는 유한한 지식과 자아에 잠식당한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사물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해야할 것이다. 즉 분별심과 편견으로 가득한 지금의 작은 나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내가 되려 노력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도 저서 <소유냐 존재냐> 에서 자의식에서 벗어나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이성을 끊임없이 흐르게 하라고 말했다. 영화 <버드맨> 에도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단일성
모두가 입을 모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위해선 우선 내 지식, 내 경험, 내 입장, 내 기준에서의 쓸모만이 옳다는 자의식에서 벗어나야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세상을 옳고 그름으로 나누지 않고 나눠지기 이전의 상태, 즉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든 사물들의 구별이 사실은 의미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을 단일성이라 한다. 예를들어 우리는 사람이자, 포유류이자, 동물이자, 진핵생물이자, 생물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를 구성하는 원자 단위까지 가면 만물이 하나일 것이다. 물론 장자에서 말하고자하는 단일성이란 이렇게 논리적으로 따지는 차원을 넘어서 사물의 깊은 차원을 통찰할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서 봤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하늘에 계신 거룩한 하느님, 당신의 눈으로 보시면 오직 나이 많은 어린애와 나이 적은 어린애가 있을 뿐이고, 그 밖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처럼 하늘, 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다르다고 아웅다웅 하는 것들은 정말 사소한 구별에 불과하다.
14. 옛 사람들 중에는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얼마나 깊은 경지에 이르렀을까?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지극히 완전한 경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었다. 그 다음은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아직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다음은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면 道가 허물어진다. 도가 허물어지면 욕망(愛)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루고 허물어지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룸과 허물어짐이란 따로 없는 것 아닐까?
<장자> 제 2편 제물론
운명을 받아들임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마시기 직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간다. 나는 죽음의 길, 너희들은 삶의 길. 어느 길이 더 좋은 것인가 신(神)만이 알 것.
플라톤, <Apology(소크라테스의 변론)>
우리는 불과 1초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데, 언제 살고 언제 죽을지는 어떻게 알겠는가? 아무리 의학 기술이 발달해도 싱크홀이 생겨서 땅이 꺼지면 나는 죽을 것이다. 그것은 운명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에 주어진 운명을 의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죽음, 전쟁, 경제위기, 사고, 질병, 가정환경 등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또한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심지어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통제하는 것 조차 어렵지만 우리는 생각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과학적으로는 default mode network 를 참고해보자). 아무튼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이성이 필요할 것이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인간의 실존적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이 우주는 특별히 나만 편애하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좋고 나쁨이 없이 그냥 있을 뿐이다. 모든 좋고 나쁨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는 오로지 내면을 수양하여 명경지수(明鏡止水), 즉 거울처럼 맑고 물처럼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라고 한다.
4. 상계가 말했습니다. “그는 ‘앎’으로 그 마음을 터득하고, 그 마음으로 영원한 마음을 터득하는 등 자기 수양에만 전념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듭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춰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장자> 제 5편 덕충부
11. 이름에 매이지 말고, 꾀의 창고 되지 말고, 쓸데없는 일 떠맡지 말고 앎의 주인 되지 마십시오.
무궁한 도를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에 노니십시오. 하늘에서 받은 바를 완전히 하고, 터득한 것을 드러내려 하지 마십시오. 역시 비움뿐입니다. 지인(至人)의 마음 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대로 응할 뿐 갈무리해 두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기고 상함을 받지 않습니다.
<장자> 제 7편 응제왕
이처럼 얄팍한 지식으로 시비를 가리지 않고, 옳고 그름을 잊고, 자기 자신 까지 잊어서 '좌망(座忘)'하게 되는 것이 '명경지수', 또는 '도'의 경지이다. 장자에서도 좌망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역시 명상을 제시한다. 아무튼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그저 가만히 있으면서 오는 것이든 가는 것이든 대상을 비출 뿐, 더러운 것을 비춘다고 더러워지지 않고 예쁜 것을 비춘다고 예뻐지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외부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유지하면서 의연히 대처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맑은 거울, 깨끗한 물과 같은 마음가짐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얄팍한 지식으로 상대방을 깨우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거울처럼 상대의 주장에 대한 질문을 통해 스스로 잘못됐다는 것을 깨우치게 했다. 만약 소크라테스도 맞대응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려했다면 더 많이 알고 논리적인 사람이 이겼겠지만 서로 배우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끗
돈, 명예, 외모, 권력, 지식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암흑물질이 어쩌고 블랙홀이 저쩌고 하는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그것을 끝까지 파고 들어 밝힌다고해서 우리가 인간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장자의 말처럼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것을 삶의 목표로 삼으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할 뿐이다. 나의 연구도 지식을 추구하는 일이긴 하지만 유한한 삶을 위한 수단일 뿐 삶의 목표로 삼을 만한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주어진 운명 안에서 도의 경지에 살아보려한다. 글을 쓰다 보니 갑자기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 가 생각난다. 마지막으로 이 노래 가사를 인용하며 포스팅을 마치겠다.
너한테 십만원이 있고
나한테 백만원이 있어
그러면 상당히 너는 내가 부럽겠지
짜증나겠지 근데 입장을
한번 바꿔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고
나는 과연 니 덕분에 행복할까?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만족할까?
아니지
세상에는 천만원을 가진 놈도 있지
난 그놈을 부러워하는 거야
짜증나는 거야
누가 더 짜증날까
널까?
날까?
몰라 나는
근데 세상에는 말이야
부러움이란 거를 모르는 놈도 있거든
그게 누구냐면 바로 나야
장기하, <부럽지가 않어>

'한권의 책이 남기는 충격 (한남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 일기] <이토록 멋진 휴식 (TIME-OFF)> - 의도적으로 타임오프하라! (0) | 2023.02.12 |
---|---|
[독서 일기]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 끊임없이 흘러야 행복하다 (1) | 2023.01.02 |